좋은글

동아일보 신춘문예 2011

관음죽 2011. 1. 28. 20:04

2011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

 

오늘의 운세 

권민경

 

 

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

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

 

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

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

뚝 끊어진 길을 건너

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

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

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

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

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,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

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

 

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

갓 난 내가 기어 나오고

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

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

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

눈물 흘리는 솜털들

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

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

 

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

점괘엔

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

 

 

2011 문화일보 신춘문예-시 당선작

 

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

강은진

 

 

문득, 썩지 않는 것이 있다

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

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

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

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

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

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

더 모호해질 내 눈썹

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

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

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

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, 왔다가 가고

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

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

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

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

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

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

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

 

2011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

 

새는 없다

박송이

 

 

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

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

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

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

난간에 기대지 말 것

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

바람이 불었고

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

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

알몸으로 동동 떨었다

지구가 돌고

어쩐지 우리는 우리의

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

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

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

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

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

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

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

새들은

위로 위로

날아

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

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

미끄럼틀을 타는 동안

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

알몸이

둥글게 둥글게

아침을 입는 동안

우리의 놀이터에

정작 우리만 있다